4월29일 강화도답사 > 포토갤러리

포토갤러리

HOME > 게시판 > 포토갤러리
포토갤러리

4월29일 강화도답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5-02 11:37 조회288회 댓글0건

본문

4월29일 강화도답사 

 

 

오전 7시30분

공복에 따뜻한 김밥 한줄은 너무 맛있었습니다.

모두가 기다리던 강화도 답사

이제 출발 합니다.~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강화도 역사

나무위키

역사적으로 굉장히 유명한데, 일단 지리상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 및 대한민국의 수도인 한양/서울과 가까우며, 양 지역의 주요 하천인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바다 쪽 출구를 막는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우선 몽골군에 항전하던 고려 무신정권이 수도(강도江都)로 삼았던 역사가 있고, 조선 인조가 즉위하던 시절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청나라 군대를 피해 강화도로 도피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다. 이때 봉림대군 등이 인질이 되었는데, 인조로서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과 같았으며 결국 얼마 못가서 남한산성에서 항복한다.

왜란·호란 이후에는 강화유수부로 지정, 한양의 외곽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 중 하나였다.[1] 조선시대에는 강화도의 중요성이 '나라의 심장'과 같다고 하여 강화도를 '심도(沁都, 한자는 心이 아닌 沁을 썼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2]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의 상징이었다. 살려두기는 위험하지만 죽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많은 인물들을 유배를 보낼 때 강화도로 보낸 일이 많았다. 고려의 희종에 이어 조선의 연산군, 임해군, 영창대군, 광해군 등이 이 곳에 유배되었으며, 철종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강화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광해군은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여기에 유배시켰다가 자신도 인조반정으로 여기에 유배되었으니 인생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근현대에 와서도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가 침공해와서 벌어진 병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인한 미국이 강화도를 침공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했고, 우리나라가 일본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 등 하여튼 일이 많다. 강화도의 역사를 공부하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절반을 먹고 들어간다는 농담이 존재할 정도. 한국전쟁에는 개성의 실향민들이 이 곳에 거주하면서 개성의 문화를 이었다고 한다.

덤으로 크고 작은 고인돌이 은근히 도처에 깔려 있다. 얼마나 많은지 고창군, 화순군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상태. 관광지로 지정되어 얼굴이 자주 팔리는 큰 녀석 이외에도, 지나가다가 밭 한가운데나 산길 옆에 고인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는 걸 보면 충격과 공포. 그게 고인돌인지 모르고 보면 그냥 굴러다니는 돌덩이로 보일 정도의 위장(?)이 되어 있다. 관심 있는 이라면 강화 북부와 서부에 몰려있으니 그 쪽을 뒤져볼 것.

강화도에선 로마나 경주시, 풍납동처럼 건물을 지으려고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있던 도자기 등 유물들이 발견돼서 공사가 중단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게 당연한 것이 이 좁은 강화도에 무신 집권기, 즉 강도 천도 당시 30여 개의 궁궐을 지었기 때문(....) 거기다가 강화도에서 출토된 유물이 국보가 되는 사례도 있고 팔만대장경을 만든 선원사도 부지만 어마어마하니..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있습니다.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있습니다.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진종사라 부르다가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주가 승려 인기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옥등을 사주한 후 전등사로 부르게 되었다.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광성보

조선 1658년(효종9년)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1679년(숙종 5년)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여 이에 소속시켰다. 신미양요 때(1871년)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 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있다.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8aa24bd5830d6acab2d4dcfcdc330acb_1651458

 

이제는 식사 시간 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소 : 서울 중구 태평로1가 31-23 건설회관빌딩 3층 | 상호명 : 세종관광통역가이드학원 | 사업자등록번호: 104-86-10328
상담실 : duckdumb@naver.com | 상담전화:02-730-3838, 02-723-0377  

Copyright ⓒ ssejong.com All rights reserved.

관리자로그인 메이크24 바로가기